제거하면 그만이야.
오징어 먹물로 칠을 했대도 믿을 만큼 검디검은 두 눈과 머리카락. 창공이 끝없이 뻗어 있는 엘라사르의 화창함 속에서도 창백한 피부를 유지할 정도로 볕을 꺼리는 성정. 간혹 기름칠을 잊은 날에 낮게 깔리는, 의수의 금속이 서로 맞물려 긁히는 소리.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선명한 살의.
Recipe for disaster.
웃을 때와 표정을 구길 때의 인상 차이가 크다. 느끼는 바를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얼굴에 써 놓는다.
| 비어 있는 오른팔
이는 기억에서 소거되었다가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다. 리우스 길바닥에서 길을 잃었다가 시장 잡배들의 싸움에 휘말려 오른팔이 절단되었다. 당시 아나힌은 7 세였다. 실랑이 벌이는 소리를 싫어한다.
처음 3 년 동안은 필기구 한 자루 쥐어 본 적 없는 왼손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으며, 부재를 들키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의수에 대한 의존성을 자각한 것은 아블라흐 입학 후의 일이다.
처음 착용했던 의수는, 팔이라기보다 몽둥이에 가까웠다. 그것으로도 빈자리가 채워지긴 했으니까. 실용성을 위해 안쪽을 비운 금속 구조물 내부에 지지대와 관절 기어가 심어져 있다. 키가 너무 커 버려 양팔의 길이가 차이 날 때, 개선하고 싶은 기능이 있을 때, 또는 수리가 필요할 때 뒷골목을 찾는다.
현재 오른팔 7 호 사용 중.
| 선빵필승
최적의 방어는 공격이다. 아나힌은 그렇게 살아남아 왔다.
얼핏 가볍게 들릴 수도 있는 이 생존 양식은 아나힌의 사도로서의 신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오염이니 이단이니, 전부 제거하면 그만이야.
| 볕 들지 않는 풍경
빛은 너무 많은 것을 밝힌다.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가려진 공간 속에서 아늑함을 느낀다.
| 반쪽짜리 손재주
요리나 그림 등의 섬세한 손재주가 필요한 일에는 영 재능이 없다. 본디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일까.
| 너도, 언젠가는 떠나겠지
아나힌이 17 세가 되던 해, 아블라흐 입학 후에도 간간이 연락을 이어 오던 고향 친구가, 편지 한 통을 마지막으로 엘라사르를 떠났다. 버려졌구나. 아나힌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 신임 없는 이해관계
지킬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사도가 되었다. 그뿐이다.
신이라는 방관자가 자신에게 권능을 쥐여 준 이유는 뭘까. 아나힌은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는 사도로서 맡은 소임을 다하고, 오쿠르는 그에게 필요한 능력을 제공한다. 깔끔한 거래이지 않은가.
| 유언장
나 아나힌은 다음과 같이 유언한다.
사망이 확인되는 즉시 나의 모든 재산을 소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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